신분을 숨긴 주인공들이 범죄조직 밖으로 나오고 있다. 증권사 신입사원과 고등학생, 아파트 입주민으로 위장하는가 하면, 스타 셰프라는 명성을 내려놓고 해외 주방의 막내가 되기도 한다. 최근 콘텐츠에서 언더커버 설정은 범죄 수사를 위한 장치를 넘어 인물의 욕망과 관계, 정체성을 드러내는 서사로 확장되고 있다.
언더커버는 오랫동안 범죄·첩보물에서 자주 활용된 소재다. 신분을 감춘 수사관이 조직 내부로 들어가 증거를 모으고, 정체가 드러날 위기에서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그러나 최근 작품들은 이 익숙한 문법을 직장과 학교, 아파트, 주방 등 일상적인 공간으로 옮겼다. 잠입하는 인물과 목적도 한층 다양해졌다.
‘언더커버 미쓰홍’(tvN, 2026)은 199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30대 엘리트 증권감독관 홍금보가 수상한 자금 흐름을 파헤치기 위해 증권사 신입사원으로 위장 취업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나이와 직급을 모두 바꾼 주인공이 직장 생활을 다시 시작한다는 설정을 통해 수사극과 오피스 코미디를 결합했다.
‘언더커버 하이스쿨’(MBC, 2025)에서는 국정원 요원 정해성이 고종 황제의 사라진 금괴를 찾으라는 임무를 받고 고등학생으로 위장했다. 노련한 요원이 교칙과 수업, 또래 관계에 적응하는 과정을 통해 첩보 액션에 학원물의 재미를 더했다.
위장 잠입은 드라마의 경계도 넘어섰다. ‘언더커버 셰프’(tvN, 2026)는 샘 킴과 정지선, 권성준 등 유명 셰프들이 기존의 경력과 명성을 내려놓고 해외 주방의 막내로 들어가는 과정을 담았다. 가상의 인물을 연기하는 대신 실제 지위를 감춘다는 점에서 언더커버 설정을 리얼리티 예능으로 확장했다.
‘아파트’(JTBC, 2026)는 가짜 가족을 꾸려 아파트에 들어간 전직 조직 보스 박해강이 장기수선충당금을 노리고 입주자대표회장 선거에 나서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범죄조직이나 국가기관 대신 아파트라는 생활 공간을 잠입의 무대로 삼아 주민들의 이해관계와 공동체 문제를 블랙코미디로 풀어냈다.
공개를 앞둔 작품들도 이러한 흐름을 이어간다. 10월 10일 첫 방송되는 ‘100일의 거짓말’(tvN, 2026)은 경성 최고의 소매치기 김순애가 독립군과 거래한 뒤 조선총독부 통역생으로 신분을 바꿔 밀정으로 잠입하는 첩보 멜로다. 살아남기 위해 익힌 소매치기 기술이 독립군의 임무와 만나면서 인물의 선택과 변화를 이끈다.
10월 19일 첫 방송되는 ‘나의 유죄인간’(tvN, 2026)은 특수부대 출신 형사가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 재벌 3세를 감시하기 위해 남자 수행비서로 위장하는 이야기다. 수사 과정에서 형성되는 두 인물의 관계를 중심으로 스릴러와 로맨틱 코미디를 넘나들 예정이다.
최근 언더커버물이 주목받는 배경에는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살아가지 않는 시대상이 자리한다. 현대인은 직장과 가정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온라인에서는 별도의 이름과 계정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상대와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을 꺼내는 ‘멀티 페르소나’가 익숙해진 만큼, 다른 신분으로 살아가는 주인공도 현실과 동떨어진 존재로만 보이지 않는다.
시청자는 주인공의 정체를 알지만 극 중 인물들은 모른다는 점도 언더커버 서사의 주요한 재미다. 평범한 말과 행동에 숨은 목적이 생기고, 사소한 실수가 정체를 드러낼 단서로 바뀐다. 언제 비밀이 밝혀질지 모른다는 긴장감은 범죄물뿐 아니라 코미디와 로맨스에서도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언더커버 서사의 매력은 가짜 신분 자체보다 그 안에서 발견되는 진실에 있다. 이름과 직업, 목적을 숨긴 주인공은 계획에 없던 관계를 맺고 예상하지 못한 감정을 느낀다.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에는 임무의 성공 여부뿐 아니라 그동안 쌓아온 신뢰도 함께 시험대에 오른다.
SNS와 인공지능을 통해 자신을 원하는 모습으로 연출하고, 실재하지 않는 얼굴과 목소리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다. 무엇이 진짜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질수록 꾸며지지 않은 관계와 감정을 향한 관심은 커진다. 가짜 신분으로 시작된 관계가 진짜 감정으로 이어지고, 거짓말이 쌓일수록 인물의 본모습이 선명해지는 언더커버 서사가 힘을 얻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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