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때 시인을 꿈 꾸던 세침떼기 문학소녀가 좌판에서 오징어를 파는 씩씩한 엄마가 됐다. ‘폭싹 속았수다’의 문소리는 마음만은 여전히 청춘인 금명의 엄마, 애순을 연기했다.
제주에서 태어난 ‘요망진 반항아’ 애순(아이유/문소리)과 ‘팔불출 무쇠’ 관식(박보검/박해준)의 모험 가득한 일생을 사계절로 풀어낸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는 1960년대부터 2025년까지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작품에 녹였다.
대본을 보고 “무슨 역할이라도 하겠다”고 합류했다. “걱정이 많은 편이라 작품 들어가기 전이면 온갖 번뇌에 사로잡힌다”고 운을 뗀 문소리는 “할 수 있을 만큼 걱정하고 들어가자는 생각 끝에 대본리딩에 갔는데, ‘그렇게 해주시면 된다’고 하시더라. 작가님이 생각한 애순이 그대로라고 하셔서 마음이 놓였다”고 돌아봤다.
애순이의 모든 것이 대본에 녹아 있었다. 대사 하나, 지문 하나, 토시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촬영했다. 김원석 감독 역시 대본에 나와있는 모든 것을 구현해내려 연출 방향을 고심했다. 문소리는 “대본과 결과물이 이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싶었다”며 “작품이 흘러가는 속도까지 비슷했다. 대본의 힘을 믿고 작품에 임했다”고 임상춘 작가를 향한 신뢰를 드러냈다.
여러모로 특별한 작품이었다. 한 인물의 인생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넘겨 받았다. 문소리는 “나는 원래 째즈를 하던 사람인데, 카네기홀에서 덕망 높은 지휘자가 클래식 협연을 오케스트라와 하게 됐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던 재즈(스타일이)가 남아있겠지만, 작은 펍에서 공연할 때보다 지켜야 할 규칙도 많고 분위기도 달라졌을 것”이라며 “어떤 음악이 훌륭한지는 말할 수 없다. 수많은 약속을 지켜 최대한의 퀄리티로 완성하자는 마음이었다”고 답했다. 이 또한 대본의 힘이었다. 연신 “대본이 너무 좋아서”라고 말한 문소리는 “훌륭한 결과물이 나올거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제주를 들썩인 애순(아이유)과 관식(박보검)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는 금명이 태어나고 더 현실적인 부모 세대의 일상으로 연결됐다. 아이유가 연기하던 애순의 중년 시절을 이어 받은 문소리는 “바라보는 지점이 맞아야 할 것 같아 대화를 많이 했다”고 노력을 전했다. 인물을 두고 같지만 다른, 다르지만 또 같은 인물을 표현해야한다는 각자의 미션이 있었다. 겉모습은 달라졌지만, 애순의 본질은 같았다. 시인을 꿈꾸는 문학소녀 애순의 내면은 늙지 않았다.
“30대 후반부터의 애순은 보편적인 엄마였어요. 동네를 떠들썩하게 할 만한 사건을 저질렀던 애순이지만, 누구나 다 그렇잖아요. 자식 뒷바라지 하고, 살림하며 동동거리고. 별로 하는 건 없어보이지만 배우로서는 그게 큰 미션이었어요. 어렵게 느껴졌죠. 애순을 그대로 가지고 오면서 평범한 엄마를 녹여내는 것, 하는 건 없는 거 같은데 할 게 많았어요.(웃음)”
우리네 엄마, 아빠를 바라보며 그들의 10대 시절을 상상하긴 어렵다. 여기서 오는 괴리감과 사실적인 묘사도 담겨야 했다. 시청자가 보면서 한 사람으로 연결할 수 있는 지점들도 고려해야 했다. 어느정도 조율해야 맞는 것일까, 고민해도 어려운 과정이었다.

관식을 무장해제 시키는 “히잉∼” 투정, 관식의 사랑이 묻어나는 꽃핀 등 애순의 표식이 있었다. “약속이니, 애순이가 슬쩍 묻어났으면 했다”는 문소리는 “똑같다고 하면 무리가 있을 테니 어느 순간 묻어나길 바랐다”고 했다.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어린 애순에 익숙해지기 위해 ‘아이유의 팔레트’를 보고 아이유의 음악을 찾아 듣기도 했다.
‘쌈, 마이웨이’, ‘동백꽃 필 무렵’에 이어 ‘폭싹 속았수다’까지. 임상춘 작가의 대본은 시청자뿐 아니라 배우도 홀린다. 앞서 대본의 힘을 강조했던 문소리는 또 한 번 임 작가의 대본을 언급하며 “누가 대본을 안 보여주고 ‘자식이 대학갈 때부터 뒷바라지 하고 남편 먼저 보내는 역할’이라고 말하면 당기지 않았을 거 같다. 오히려 ‘왜 나한테 그런 걸 하라고 해?’라고 물었을 거다”라면서도 “이 대본은 읽으니 그런 생각이 하나도 안들더라. 이 중에 무슨 역할이라도 하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문소리가 애순이 되고 애순이었던 아이유가 금명으로 다시 등장했다. 좋은 대학에 턱 하니 붙고, 서울 살이를 시작한 금명이의 모습은 기특했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에 투정부리는 금명을 두고 시청자의 꾸지람도 있었다. 문소리는 이를 두고 “다들 효도하고 사나?”라고 천진하게 되물었다.
문소리에게도, 엄마가 된 애순에게도 귀하기만 한 딸 금명이었다. “내가 딸이라 그런지 나는 금명이 편”이라고 부연한 문소리는 “금명이가 일찍 철이 들어 마음 고생이 많았다. 그렇게 반듯하기가 어려운데 미안한 마음 밖에 안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불법 과외를 하며 생활비를 벌던 금명이의 에피소드를 언급했다. 대리 수능의 제안을 받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경찰서까지 간 금명은 차마 부모님께 연락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그런 일을 겪고도 엄마한테 아무 말도 못하는 금명이었다. 내 딸이 혼자 울고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속상할 것 같다. 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정말 최고의 딸이었다”고 금명을 향한 애정을 표했다.
애순을 연기했지만 돌아보면 문소리도 금명이 같은 딸이었다. 이번 작품을 통해 딸으로서 느끼는 감정도 컸다. 문소리는 “너무 이입이 되는 캐릭터였다. 엄마가 속상했겠다 싶어 반성도 들었다”면서 “그래서 내가 늘 금명이 편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금명이를 이해하는 마음이 컸기에 섭섭하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아이유가 그렇게 짠할 수가 업었다”며 웃음을 보인 문소리는 “저렇게 모든 걸 잘 해내고 계신 분이 왜 짠한 지 모르겠는데, 늘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

애순과 관식, 금명과 은명도 시간이 흐르며 성장했다. 배우이자 한 인간으로서 늙는다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 고민하게 한 작품이었다. 광례만큼 거칠어질 것인가. 애순처럼 문학소녀의 꿈을 안고 살아갈 것인가 고민되는 지점도 있었지만, 없는 형편에도 꽃 같이 살게 해주려던 관식의 사랑이 있었다. 세 이모들의 큰 사랑까지 더불어 그런 풍파를 겪더라도 고운 면을 간직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문소리는 “늘 꽃밭에서 살았던 애순의 소녀스러움의 간극이 컸다. 이 안에서 어떻게 늙을지, 미적붙보다 답을 내기 어려웠다”고 답했다.
영화 ‘박하사탕’으로 데뷔해 OTT 시장이 확장 이후 ‘퀸메이커’와 ‘지옥’ 시리즈에 이어 ‘폭싹 속았수다’까지, 넷플릭스를 통해 대표작을 하나씩 경신하고 있는 문소리다. “큰 변화들에 뒤쳐지지 않고 발맞춰 가고 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면서도 “그렇다고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하던대로, 모자란 점을 조금 더 채워가고 싶다”고 겸손한 답을 내놨다.
인터뷰 말미, 취재진과 ‘폭싹 속았수다’ 속 명대사를 꼽던 문소리는 “대본집이 나왔으면 좋겠다. 꼭 기사에 써 달라”고 힘주어 말했다. “작품 속 대사를 읽으면서 듣는 게 또 다를 것 같다. 강력하게 요청한다”며 작품을 향한 애정을 표했다.
정가영 기자 jgy9322@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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