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원의 쇼비즈워치] 아이즈원으로 보는 日의 ‘문화적 개방’ 메세지

걸그룹 아이즈원이 이달 16일 일본 NHK ‘우타콘’에 출연한다. 시청률 10%대를 오가는 NHK 대표 음악프로그램이다. 아이즈원으로선 지난달 25일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출연이다. 신곡 활동 들어간 것도 아닌데 불과 한 달도 안 돼 다시 부른 것도 이례적이지만, 가장 이례적인 건 역시 그 ‘시기’다. 일본정부의 대(對)한국 수출규제조치 이후 양국 간 반감이 극대화된 상황에서 나온 출연결정이기 때문이다.

 

한일합작 팀이어서 다르게 보기 때문이란 해석도 있지만, ‘우타콘’ 공지내용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화제의 걸그룹 아이즈원이 그 K팝을”이라며 타 K팝 그룹 히트곡을 커버할 것임을 공지하고 있다. 한국선 일본제품 불매운동까지 벌어지는 와중에 ‘K팝’이란 서브장르를 명시하고 있다는 점. 다른 식으로 보자면, NHK 측으로선 ‘이 시기에 K팝을 부르게 하기 위해 아이즈원을 초청했다’고도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왤까. 짐짓 의아해지는 대목이지만, NHK 성격과 지난 흐름을 생각해보면 이 같은 결정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다.

 

알다시피 NHK는 일본의 공영방송이다. 프로그램 편성과정에서 여타 민영방송 식 상업논리로부터 벗어나는 결정들이 상대적으로 잘 이뤄진다. 대신 프로그램 편성과 구성 하나하나에 ‘메시지’가 들어간 경우가 많다. 뉴스야 공영방송 특성상 무미건조한 스트레이트 내지 기계적 균형감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지만, 교양과 드라마, 예능프로그램 등 차원에선 좀 다르다. 공영방송 입장에서 국민들에 던지는 사회문화적 메시지가 들어가는 부분이 많다.

 

그럼 특히 한일관계 차원에서 NHK가 그간 던져온 ‘메시지’는 뭐였을까. 의외로 일목요연하다. ‘문화적 개방’이다. 정치경제사회적 차원에선 그때그때 격돌이 일어날 수 있어도, 문화만큼은 서로 교류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단 메시지다.

 

애초 ‘K팝 흑선’이라 불리는 2010년 한국 걸그룹 일본상륙 러시 때부터도 그랬다. 소녀시대 일본 쇼케이스 무대를 가장 먼저 9시 메인뉴스 ‘뉴스워치9’에서 톱뉴스로 내보내며 뜨거운 관심을 조명한 게 NHK다. 이후 2017년 트와이스가 다시 일본서 인기를 얻기 시작하자 역시 가장 먼저 아침정보프로그램 ‘오하요 닛폰’에서 한일문화교류 가교로서 12분에 걸쳐 대대적으로 소개했다. 이런 흐름이 아이즈원까지 이어지고 있다. 음악토크프로그램 ‘시부야노트’와 ‘우타콘’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소개하며 연말 ‘홍백가합전’ 출장까지도 예측되고 있는 상황이다.

 

비단 K팝만도 아니다. 돌이켜보면 NHK는 언제나 일본에 한국문화를 전하는 데 가장 적극적인 방송사였다. 일본한류 불을 당긴 KBS2 드라마 ‘겨울연가’ 신화도 NHK 위성채널 BS2에서 2번, NHK 자체에서 한 번 더, 총 삼방을 편성하며 이뤄진 것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늘 화제가 되는 최고시청률 연말프로그램 ‘홍백가합전’까지도 언급될 수 있다. 한류란 개념 자체가 아예 없던 1987년 조용필 초청을 시작으로 2000년대 전까지 패티김, 김연자, 계은숙 등을 계속 초청해왔다. 사실상 한일 간 감정 문제가 더 심각했던 시절부터 꾸준히 문화교류 메시지를 전해오고 있었던 셈이다. K팝 한류 붐 이후론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뚜렷한 한국에의 ‘문화적 개방’ 메시지는 그 바탕이 명확하다. NHK가 특별하고 일본 공영방송이 남달라서가 아니다. 사실상 현대문명사회 어디서나 통용되는 국제문화교류 대원칙에 속한다.

즉, 국가 간 정치 외교적으로 원만하고 안정돼있어야 문화도 왕성히 교류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정반대로, 어떤 상황에서건 문화만큼은 서로 왕성히 교류되고 있어야 정치 외교적 갈등도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단 입장 말이다. 문화교류를 통해 서로 간 정서와 사고에 대한 이해가 전제돼야 비로소 대화의 바탕도 마련될 수 있단 논리다.

 

다른 식으로 보자면, 애초 정치와 문화는 그 작동논리와 역할론이 서로 크게 다르단 얘기다. 정치는 결국 어떤 식으로건 갈등과 대립을 감내해서라도 주도권을 얻어내고 우위에 서려는 생리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러나 문화엔 전혀 다른 역할론이 부여된다. 그런 현실적 갈등과 대립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론 평화와 공존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 정서적 기반을 마련하고 사고의 틀을 확장시키는 역할이다.

 

큰 시각에서 보면, 본래 인접국끼린 정치 외교적으로 사이가 원만한 경우가 거의 없다. 세계 어디나 그렇다. 인접국 특성상 과거 영토를 뺏고 뺏기는 관계가 벌어진 역사들이 반드시 존재해서다. 바로 지척 비교대상이니 라이벌 의식도 상당히 강할 수밖에 없다. 아시아 밖에선 서로 간 헐뜯기와 조롱의 수위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높은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늘 문화적 차원에선 서로에 관심이 많고 서로의 문화에 큰 매력을 느끼는 게 또 인접국끼리 특성이기도 하다. 어떤 상황 하에서라도 서로의 문화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 소비시장을 반드시 갖춰버리고 만다. 서로 정서의 골자는 비슷하면서도 그 자세한 면면은 또 다른 매력, 유사성과 차이성의 절묘한 조합이 서로를 끌리게 한다. 어차피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되며 막아봤자 소용없는 흐름이다. 오히려 막아 세우려 할수록 부작용과 폐단만 늘어난다. 한국서 일본문화 영향력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했던 시기는 1998년 일본대중문화 개방조치 직전이었음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어찌됐건 현 시점 한일관계는 확실히 냉각 흐름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사실상 ‘당연한’ 문화의 역할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정치논리에 종속되거나 나아가 그를 강화시켜주는 불쏘시개로서 선택적으로 작동돼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 정반대로 나아가야 할 게 문화이고, 문화미디어의 본래 역할론이다. 문화교류에 대한 방어야말로 국가와 국가 간 관계의 최종보루이기 때문이다.

 

그런 교류마저 끊어지는 시점은, 그저 단교와 같은 절차의 시작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파시즘의 시작이다. 우리가 우리를 스스로 파괴하는 시점이란 얘기다. 현재 한국의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하나둘 문화영역까지도 스멀스멀 침범해오려는 분위기다. 관련해 뚜렷한 인식이 요구된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사진 = 오프더레코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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